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퀴외스티 칼리오 (문단 편집) === 총리 칼리오 === 1922년 11월 14일 처음 총리로 취임한다. 칼리오 내각은 그해 8월 [[핀란드 사회주의 노동자당]] 당원 200명을 체포했다. 이때 사회주의 노동자당의 준군사조직, 지도부, 그리고 현직 의원 27명까지 모조리 체포되었다. [[핀란드 사회민주당|사회민주당]]은 의회 정족수가 미달하게 되었으니 의회를 해산하고 재선거를 할 것을 요구했다. 우파는 좌파가 이번 체포로 피해자 행세를 하며 선거에 이용하기 전에 먼저 선고부터 내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스톨베리 대통령은 사민당과 합의하여 새로 선거를 하기로 했다. 칼리오는 불복했고, 스톨베리는 칼리오를 실각시켰다. 이것은 내각책임제를 존중하던 스톨베리 대통령이 총리에게 개입한 거의 유일한 사례였다. 그리고 이때까지만 해도 칼리오는 아직 좌파들에 대하여 경직된 반공주의자였음을 알 수 있다. 스톨베리 이후 농업동맹의 [[라우리 크리스티안 렐란데르]]가 2대 대통령이 되었고, 칼리오는 1925년 12월 두 번째로 총리가 되었다.[* 그 사이 1923년에는 뭔가 안 어울리게 방위장관도 한 번 역임한다.] 칼리오는 이번에는 거대 임산기업들을 국유화하여 농민들에게 임야를 불하하는 "풀키넨법"을 시행했다. 이런 토지개혁 문제 때문에 농업동맹은 1920년대 내내 대지주 중심의 보수정당 [[국민연합당]]과 사이가 껄끄러웠다. 그렇다고 내전의 앙금이 남아 있는 사민당과 사이가 좋지도 않았다. 그래서 이런 애매한 상황 때문에 사민당의 [[배이뇌 탄네르]] 내각이 1926년 소수여당내각으로 입각하는 진풍경도 벌어졌다. 1930년 6월, 핀란드의 자생적 파시스트들인 [[라푸아 운동]]이 당시 총리였던 칼리오에게 접촉해 그를 지도자로 영입하려 했다. 하지만 칼리오는 거부했다. 전국의 라푸아 운동가 1만 2천여 명이 헬싱키로 진군해 오던 중인 7월 4일, 렐란데르 대통령이 사태를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고 우익에게 기울자 칼리오 내각은 총사퇴했다. 렐란데르는 라푸아 운동의 요구에 따라 스빈후부드를 총리로 기용했다. 1931년 대통련 선거에서 칼리오는 농업동맹 후보로 선출되었다. 재임 기간 중의 무능으로 당내 위상이 실추된 렐란데르는 칼리오에게 트롤링을 했고, 칼리오는 300표 중 56표를 득표해 낙선했다. 3회의 결선투표 끝에 151표의 스빈후부드가 149표의 스톨베리를 간발의 차로 누르고 제3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이때쯤 되면 칼리오의 좌익(적어도 탄네르 같은 개량주의자들)에 대한 태도는 상당히 유해지는데, 1936년 네 번째로 총리가 되었을 때 사민당에 손을 내밀고 입각을 권유하기도 했다. 하지만 극렬 반공주의자인 스빈후부드가 거부권을 행사해서 농민-사민 연정은 일단 실패한다. --그리고 스빈후부드의 노망전설이 시작된다-- 스빈후부드는 이후 임기 말까지 농민-사민 연정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데 골몰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